청리움 소식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명당의 귀혈(貴穴), 청리움과 봉천암 - 안영배 풍수학 박사

2026.06.17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명당의 귀혈(貴穴),

 

청리움과 봉천암

 

풍수학 박사 안영배

 

 

 

 

 

봉황: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서로운 새

 

 

 

· ‘새 중의 왕은 봉황이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라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등장한다.
봉황은 고대로부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일컬어져왔다.
· 봉황은 평화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성인(聖人) 혹은 성군(聖君) 의 탄생과 함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예로부터 봉황이 출현할 경우 어떤 이가 권력을 행사하든 그의 통치 시대는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믿음이 전승돼 왔다.
· 봉황은 혼자 날지 않는 새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봉’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황’이 항상 짝을 지어 날아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속담처럼 ‘봉 가는데 황간다’는 말이 있다. 봉황은 늘 함께 한다는 의미로 부부금슬을 상징하기도 한다.

 

 

봉황에 대한 기록

 

 

 

· 중국에서 요순시대는 태평성대(太平聖代)와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는 시대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하늘이 성군이 베푼 선정을 칭송하는 징표로 봉황을 출현케 했다고 전해진다.
·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봉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단혈산(丹穴山)에 봉황이 사는데, 이 새는 길조와 인애 (仁愛)의 상징이며, 사람 사는 곳에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 중국 당나라 때 문장가 한유(韓愈:768-824)가 지은 『송하견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새 중에 봉황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나타난다.”

 

 

 

 

· 전국시대 역사서 『죽서기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봉황이 황제헌원과 요(堯)ㆍ순(舜)ㆍ주(周) 임금 때 출현하여 춤을 추었다.”
·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봉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봉황은 더할수 없는 훌륭한 정치가 일어날 때 ‘임금의 어진 정치에 하늘이 감응해서 나타난 길한 징조[서응(瑞應)]’인데, 이는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일을 상징하며, 순(舜)임금과 문왕(文王) 같은 덕이 있어야만 봉황새가 와서 춤추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세종대왕은 나라에 공식적인 연회가 있을 때 왕가의 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송축가(頌祝歌)를 지어 불렀는데, 그 가사를 봉황음(鳳凰吟)
이라고 하였다. 봉황음은 조선 세종 때 윤회(尹淮:1380-1436)가 지은 것이다.

 

 

격이 다른 두 신수 : 권력의 용, 덕치의 봉황

 

 

우리 선조들은 왕의 상징으로 용보다는 봉황을 더 선호했다. 이는 용과 봉황에 대한 전설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는 전설을 보면 용은 권력, 출세, 일확천금의 기운을 안겨주는 신수(神獸)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사소한 실수와 무관심에 대해서 용서를 하지 않는 잔인함을 보인다.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주민을 몰살하거나 마을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을 괴롭히는 용을 무찌른 장수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돼 오기도 했던 것이다.
반면 봉황은 그 어떤 전설에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람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거꾸로 봉황의 쉼터인 오동나무와 그 먹이인 대나무를 베어버려 봉황이 찾아오지 않게 돼 더 이상 그 마을이나 지역에서는 인재가 배출되지 못했다는 전설은 많다.
봉황은 따스함을 품고 감동을 주는 존재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워주는 하늘의 전령사인 것이다.

 

 

 

봉황과 관련된 지역의 전설

 

 

 

봉황의 전설이 전해져오는 지역이나 산에서는 봉황을 닮은 지형을 발견할 수 있고, 오동나무와 대나무 등으로 봉황이 찾아오도록 유도한 지명(地名) 이 발견된다. 청리움 안에 봉황의 쉼터인 오동나무를 뜻하는 梧河산방이 들어선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설악산 봉정암의 봉황 전설

신라 선덕여왕 시기인 644년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뇌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기 위해 여러 곳을 순례했지만 적당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한곳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에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자장율사 앞에 나타났다. 자장율사는 날아가는 봉황을 뒤쫓았다. 봉황은 어느 높은 봉우리를 선회하다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봉황이 선회한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의 모습이었고, 봉황이 사라진 곳은 부처의 이마에 해당했다. 자장율사는 부처 형상을 한바위에 뇌사리를 봉안하고 오층석탑을 세웠는데 바로 봉정암(鳳頂庵)이다. 봉정암은 봉황이 부처의 이마로 사라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한국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황포란형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영주 부석사의 봉황 전설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경북 영주의 부석사는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의 명당터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절을 세울 때 산적들의 행패가 심했다.
이때 의상대사를 사랑한 중국 여인 ‘선묘낭자’가 나타나더니 번개를 일으키며 산적들에 대항했다. 이에 산꼭대기에서 봉황이 날아와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으면서 산적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다. 산적들은 낭자와 봉황의 도움을 받는 의상대사의 도력에 감복해서 절을 짓는 데 일조했다.
의상대사는 절이 완성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부석(浮石)’이라 지었고, 부석사가 위치한 산 이름도 봉황이 나타났다고 해서 봉황산이라고 불렀다.

 

 

봉황포란형 鳳凰抱卵形 명당에 위치한 경북 영주 봉황산 부석사

 

 

가평 보리산의 봉황 전설

봉황 기운이 깃든 보리산 청리움의 주소는 가평군 설악면은 오래전부터 명당 길지로 소문난 곳이기도 했다. 언문(한글)으로 기록된 비결서인 ‘정감록비결’은 전쟁과 전염병, 기근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가평을 지목한 바 있다. 정확히는 가평군에서도 설악면 일대를 가리킨다.

 

 

 

 

길지에는 그 기운에 맞게 빼어난 인물들의 스토리가 전해지게 마련이다. 설악면 지역의 옛 이름인 미원현 역시 고려 후기 공민왕 당시 국사(國師)였던 보우대사와 관련이 깊은 땅이다. 우리나라 임제종의 시조인 보우대사는 이 고을의 소설암에서 주로 머물렀고 열반도 이곳에서 맞이했다.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지냈는데 수시로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공민왕은 그를 흠모하여 왕사로 모셨고 대사의 고향이며 머물고 있는 땅인 미원장(迷原莊)을 현(縣)으로 승격시켰던 것이다. 그는 당시 나라를 어지럽히던 신돈을 비판하고, 나라의 혁신을 위해 한양 천도를 건의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가 머물던 소설암(小雪庵)의 소설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소설(小雪)과 성곡(城谷)을 합쳐 설곡(雪谷)이 되었다. 오늘날의 보리산 바로 남쪽에 있는 설곡리가 바로 그곳이다.

 

 

 

 

미원(설악) 땅은 조선시대에도 주목을 받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태종 16년(1416년)에 미원땅에 국가 잠실(蠶室)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은 “정해년에 조종과 미원에 잠실을 설치하여 각각 잠모(蠶母) 10명, 종비(從婢) 10명, 노자(奴子) 20명씩을 소속시켰다”고 적고 있다. 서울 송파구의 잠실이나 강남구 잠원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므로, 조선 최초의 국가 경영 잠실은 가평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좋았다는 뜻이다.
고봉 기대승의 고봉집에서는 영남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의 행장(‘김선생 행장’)을 기록해 두었는데, 김굉필이 미원 땅을 길지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김굉필은 “양근군(楊根郡)에 미원(迷原)이라는 좋은 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고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즐기어 집을 짓고 평생을 마칠 뜻이 있었으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했다. 이 기록은 미원 땅이 당시에는 양근군(앙평)에 속했음도 보여준다.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 왜 미원 땅이 살 만한 곳으로 회자되고 있었을까.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미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근땅에는 읍치에서 북쪽 40리에 소설촌(小雪村)이 있는데 미원에서 산골짝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곳이다. 푸근하고 널찍하며 평온한 땅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에도 유일하게 편안하였고 은거할 만하다.”
이 기록은 정감록에서 언급한 십승지 중 하나로 가평 설악면을 꼽는 것과도 일치한다. 이규경은 정확히 가평군(당시는 양평) 설악면 설곡리 일대를 삼재를 피할 수 있는 길지로 보았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들면서 정감록(鄭鑑錄)을 모방한 수많은 비결서들이 많이 나왔는데, 경기도권에서는 보우대사가 머문 소설암의 소설촌이 십승지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풍수지리학으로 보면 보리산 정상의 봉황은 양 날개를 쭉 펼친 채 동쪽인 홍천을 바로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보리산은 단봉산(丹鳳山)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는 구전이 지역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새해 아침 보리산 정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붉은빛 봉황(단봉)이 양기 충만한 아침 해를 맞이하는 상스러운 광경, 즉 ‘단봉조양’의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보리산 봉천암의 봉황은 부석사 선묘낭자 일화처럼 여성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신라의 원효대사 시기부터 화작보살(華작(族+鳥)菩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봉황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 위대한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신조(神鳥)이다. 지도로 볼 때 설악면 창의리 및 엄소리 쪽이 봉황의 오른쪽 날개에 해당하고 길곡리 일대가 왼쪽 날개에 해당한다. 양평군에 속하는 봉미산(鳳尾山) 일대는 이름 그대로 봉황의 꼬리가 된다. 보리산의 청리움은 봉황의 머리에 해당하는 귀혈(貴穴) 터에 해당한다.

 

 

청리움 봉천암(鳳天岩)과 봉황이 내려앉아 알을 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즉, 보리산은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 봉황이 알이 있는 둥지로 돌아오는 형)의 명당 터다.
봉황이 출현하는 곳에는 오동나무, 대나무와 함께 신령스러운 샘물인 예천(醴泉)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봉황의 쉼터인 보리산 일대에는 예천의 맑은 물, 즉 영천(靈泉)도 있다. 바로 설곡리에 있는 옻샘을 가리킨다. 바위 아래쪽 두 곳에 물이 고여 있는데, 바위를 바라보고 오른쪽 큰 약수를 ‘상탕’, 왼쪽의 작은 약수를 ‘하탕’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장마때건 가뭄때건 항상 같은 양의 물이 고여 있다는 게 지역민들의 얘기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항상 이 약수를 마시며 살았다고 한다.

 

 

 

 

 

또 옻샘은 질병 치유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옻이 올랐을 때 바르면 바로 낫는 샘물이라고 소문이 나서 1980년대 전까지만 해도 매우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옻오름뿐 아니라 여러 피부 질환에도 효력이 있다는 소문이 나 많은 중병 환자가 찾아왔다.

 

 

 

 

 

이 약수에는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원래 이 약수는 온수가 나와 각종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환자가 찾아와 마을이 흥청거렸다. 그런데 각종 질환들이 들끓게 되자 이 마을에 병이 전염될 것을 두려한 최씨 성 주민이 약수 탕에 개를 잡아넣고 휘저어버렸다고 한다. 그후 온수물의 약효가 떨어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러자 최씨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 “내가 너 때문에 부정을 탔으니 온양으로 내려가, 500년 후에나 다시 이곳으로 올라오겠다”고 말했다.
옻샘은 지금은 관리가 안되고 잊혀진 샘이 되다시피 했지만, 봉황 기운이 본격적으로 발현되는 날, 온수 신령의 예언처럼 옻샘도 예천의 물맛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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